Wednesday, December 19, 2012

잃어버린 나의 조각들





My Lost Chapters in Korean
(English version can be read click here.)

잃어버린 나의 조각들 
Cheryl S. Hagen


나의 부모님과 세 언니, 그리고 오빠는 내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던 그 날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원래는 남자아이를 입양하기를 원했지만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안 후에도 우리 가족은 입양 절차를 계속하였다. 이미 나를 마치 친가족처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언니의 얼굴에 묻은 무언가를 떼어내려 했지만 언니의 주근깨(!)는 결코 떨어질리 없었다. 이렇게 18개월의 나는 Cheryl Sun Wha Joy(셰릴 선화 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Sun Wha (선화) 만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한국의 흔적이었다.  

모르몬교 가정에서 자라며 나는 가족이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종종 나의 친가족을 생각하며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 해왔다. 왜 나의 친가족이 나를 멀리 떠나보내기로 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상상해보려 애썼다.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나의 일생을 걸쳐 계속되었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하와이를 떠나 유타로, 그 후 미시간으로 이주했을 때 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는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었고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마치 미궁 속에서 바른 길을 찾아 헤매이는 듯 하였다.

젊은 여성으로서, 나는 모르몬교의 미션을 수행하는 대신 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나와  신념을 공유하는 노르웨이인 남편 사이에 하나의 아들과 두 딸을 두고  노르웨이에서 살고 있다. 나는 집에 있는 엄마가 되기를 언제나 원해왔었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 아이들이 한국에 있는 나의 친가족과도 닮았는지 궁금해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점점 더 나의 친가족, 특히 친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을 찾고 싶었다. 내가 어떤 천성을 물려받았는지 알고싶었고, 이를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몰랐고, 나의 입양에 관련된 어떤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어보였다.

친가족을 어떻게 찾을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나는 한 웹사이트에서 40명의 한국인 입양아들을 선발하여 친가족을 찾는 목적으로 고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정보를 찾았다. 나는 나와 같은 질문과 생각들을 공유하는, 전 세계에서 온 40명의 다른 한국인 입양아들과 함께 서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며칠동안 곰곰이 생각해본 뒤 나는 지원을 하였고, 40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기쁨의 눈물이 차올랐다. 이는 내가 어떻게 입양이 되었는지 알게 될 기회이며, 잘하면 친가족과도 재상봉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슬로 공항에 가족을 남겨둔 채 떠나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나를 응원해 주었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을 수가 없어 볼을 꼬집어 봐야만 했다.

내 생일날 아침, 다른 입양아들이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 날 우리는 입양되기 전 우리가 머물렀던 고아원에 방문하였고 우리의 입양 기록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나의 에이전시는 동방사회복지회였고 이들은 나에게 깜짝 생일 케익과 생일 축하 노래를 선사해 주었다. 나는 놀라움에 할 말을 잃었지만 나의 깊은 곳 어디선가 기록과는 달리 진짜 내 생일은 다른 날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우리의 이야기가 한국의 방송사를 통해 방송되었다. 생방송 전 날 밤, 나는 무릎을 꿇고 나의 친가족이 이 프로그램을 보도록 하여 내가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께 기도하였다. 내 기도는 이루어졌다.

20초 동안 KBS TV 프로그램의 전파를 탄 나의 모습을 친아버지가 알아보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상충하는 부분이 있어 노르웨이로 돌아갈 때까지 연락을 받지 못했다.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KBS로부터 나의 친아버지에 대한 전화를 받았을 때까지도 나는 시차적응 중이었다. 나의 에이전시였던 동방사회복지회도 이메일을 통해 나에게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국 방문의 흥분이 여전히 생생했음에도 나는 그보다 더한 온갖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하였다.

나의 친아버지가 여전히 살아계시고 한국에서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게된 것, 그것은 나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다. 내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온갖 생각과 질문들로 DNA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3주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고, 점점 긴장이 되었다.

우리의 재상봉은 서울과 노르웨이 사이의 화상통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나는 친아버지와 고모, 조카들을 만났다. 아버지는 펑펑 우시며 한국말로 미안하고 날 떠나보낸걸 후회한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를 안아드리고 싶었다. 나의 조카는 내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말이 없다는 것을 찾아냈다. 화상통화를 하는 동안 내가 궁금해 해왔던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친어머니에 대해 궁금해 하였고 왜 아버지가 어머니를 찾는데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지 의아하게 여겼다.

나의 친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를 떠나셨다. 이혼으로 비탄에 빠진 아버지는 술로 이를 달래었다. 당시 아버지는 나의 할머니와 함께 사셨고 아버지는 아기를 잘 돌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할머니가 나를 돌보아 주셨다. 내가 11개월이 됐을 때 할머니는 이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고 나의 이름과 생일만 남긴 채 나를 가까운 고아원에 맡기셨다. 나중에 할머니는 이를 후회하고 나를 되찾으려 하셨지만 돌아오는 건 내가 이미 입양되었다는 말 뿐이었다. 사실 나는 다른 고아원으로 가 있었고, 보모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찾는 것을 소원하셨지만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내 진짜 한국 이름은 선한이고 내 생일은 기록보다 열흘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는지, 그리고 왜 아버지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는 건지, 나는 더 복합인 감정에 휩싸였다.

나의 시민권 서류, 혼인 증명서, 여권, 그리고 다른 공식 문서들은 이제 모두 나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가진 것이 되었다. 나의 미국 가족들은 나를 선화로 알고 있지만 한국의 가족에게 나는 선한이다. 내 생일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날을 내 진짜 생일로 삼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 했지만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두기로 하였다. 기록을 수정하더라도 내가 누구인지는 바뀌지 않는 법이다.

한국 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 나는 한 번 더 남편과 아이들을 남겨두고 홀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공항에는 통역자와 함께 친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아버지는 우리가 화상전화를 할 때와 같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고, 통역자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뒷좌석에서 나의 손을 꼭 붙잡아 주셨다. 우리는 함께 첫 식사를 했고, 나중에 합류한 조카와 함께 버스로 두 시간 거리의 고모댁으로 갔다. 그 때 우리는 통역자가 없었기 때문에 간단한 의사소통 조차 힘들었다.

친아버지의 아파트에 갔을 때 놀랍게도 그 곳에는 나의 친어머니가 와 계셨다. 통역자의 도움으로 나는 어머니에게 몇 가지를 여쭤볼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 어머니를 내려드리기 전에, 우리는 내가 태어난 장소를 함께 가 보았다. 그 집이 있던 자리는 포장도로로 바뀌어 있었고 우리 셋은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

한국 가정의 생활 양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여행은 나의 첫번째 여행과는 달랐다. 첫번째 방문에서 우리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고급 호텔에서 머물며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개인적으로 식사를 하였다.

대체적으로 모두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나도 가족과의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 위해 떠나던 날 아침, 친아버지는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여 내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 하셨다. 아버지는 격분하여 내가 드린 선물마저 망가뜨려 버리셨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서 버스를 타고 가는 두 시간 동안 아버지는 험악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잊고 눈물을 흘렸다. 며칠간 함께 보내며 쌓은 사랑과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졌고, 아버지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인상은 이러하였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지?”

친어머니와 단 둘이 남았을 때 어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젊었을 적 사진을, 나는 어머니께 내 가족의 사진을 보여드렸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선물을 교환했고, 아버지가 다른 나의 남동생을 포함한 더 많은 가족들을 만났다. 조카는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이야기를 통역해 주었다.

내가 태어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아버지의 포악한 성격과 술 문제 때문에 그를 떠나 이혼을 준비하셨다.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그가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두고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이는 어머니에게 아주 힘든 결정이었다. 당시에는 부친이 주된 생계 책임자로서 자동으로 양육권을 가지고, 모친은 아무런 권리도 가지지 못하던 때였다. 살기 안전한 집을 찾은 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셨다. 아버지는 내가 죽었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내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심장이 멈추는 듯 하였다.

외할머니가 오셔서 내 옆에 앉아 나를 보며 몇 마디를 하셨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외할머니는 나를 바라보시며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얼굴을 매만지셨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나이가 든 나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돌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들었고, 잠에 곯아 떨어지기 전 까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나에게는 영원했으면 했던 순간이었다.

마지막 날 공항에서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작별인사를 한 뒤 미소를 머금고 있는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친어머니, 그리고 친아버지와도 연락을 계속하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많은 길들이 있었지만, 나는 내 자신이 이 길을 선택했고, 이를 완전한 내 가족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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